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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인터뷰

인천사회복지 역사박물관 > 자료 > 원로 인터뷰

인천사회복지를 빛낸 인물 인터뷰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고 기적의 역사를 이루어낸, 위대한 사회복지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김영주 성촌재단 대표이사


장애인시설 한국형 모델 구축의 산파역 - 김영주 ‘성촌재단’ 대표이사

“집 한 채 없어도 후회는 없다”

정년을 마쳤지만 정작 자신의 이름으로 된 집도 한 채 남지 않았다. 사실상 사회복지 실천전문가로는 1세대인 김영주 전 ‘성촌의집’ 원장(현 ‘성촌재단’ 대표이사)은 그렇게 실천현장에서의 사회복지인생을 마쳤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사회복지사업을 한다는 것은 자선 사업이 대부분이었지요. 저같이 처음부터 복지시설을 맡아 이렇게 한 복지시설을 책임지고 운영한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나온 삶에 후회는 없습니다. 최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복지에 인연을 맺은 것은 한국전쟁이후 국내에 주둔한 미군 1군단에서 군복무를 시작하면서 부터이다. “단국대 영문과를 다니다가 카투사에 지원하여 갔지요. 영문타자도 좀 칠 줄 알고, 영어를 좀 하니까 대민원조사업에 배치를 되었어요, 1954, 55년만 하더라도 우리나라 학교들이 6.25때 모두 불에 타 목재가 필요해 각종 시설 지원 사업을 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고아원을 가게 되었지요. 고아원 원장님들이 ‘도와 달라’고 해서 가보니 그분들은 천사와 같았습니다. 오고 갈데없는 아이들 데려다가 공부시키고 의식주 해결하는 모습이 참 좋아 보였어요.” 그 모습에 감명을 받아 제대하면 ‘복지사업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1958년 8월 사회복지시설인 ‘평화원’에서 서무일로 시작해서 ‘성린보육원’ 총무를 거쳐 1965년 ‘성린보육원’(현 성촌의집) 원장을 맡았다. 그의 나이가 30세를 갓 넘은 때이다. 사무직으로 들어와 민주적으로 내부 승진한 첫 사례이다. 대부분 재단 설립자나 자식들이 대를 이어 사업을 전수하는 관례에 비하면 파격에 가까웠다. “책임자가 인천도시관광공사 전무로 계셨던 김용해 씨였지요. 그분이 지병으로 몸이 불편해지자 제게 부탁을 하시더군요. 그래서 1965년부터 보육원 원장으로 시작하여 2001년부터 대표이사로서 성촌재단을 책임지게 되었지요.”

장애인에게 별을 보게 하는 마음으로

‘성촌’을 한자로 풀면 ‘별의 마을’이다. 시설에서 거주하는 장애인들이 장애는 장해가 아닌 손상일 뿐이므로 자신의 꿈을 잃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당당한 지역사회 일원으로 살아가자는 뜻이다. 장애인에 대한 사랑과 의지를 담은 말이다. 성촌의집은 육아시설인 성린보육원으로 출발하여 1972년에 아동직업재활원 개원으로 장애인복지분야로 사업목적을 전환하였다. 당시 삼육재활원이 의료재활을 했었는데 의료재활을 끝낸 아이들이 갈 데가 없자 국가에서 직업재활을 유도하면서 시설이 바뀐 것이다.

 

“1969년에 십정동으로 이전해 와 성촌의집을 열려고 와 보니 아무것도 없었어요, 장애인들을 100명 데리고 있으니까 난리가 났지요. 시급한 것은 주민들의 인식을 전환하는 거였지요. 곧바로 통장들을 전부 모셨어요, 식당에서 점심을 대접하면서 설명을 했습니다. 협조를 구한 것입니다. 사회복지는 개인이 하는 자선사업이 아니라 사회가 동참하는 사업입니다.”라고 설득했습니다. 이후에 통장들과 가깝게 되니까 때마침 개발지구가 선정되자 개발위원장을 맡아달라고 하고 이후엔 정화위원장, 방법위원장, 주민자치위원장 등을 맡겼어요. 주민들의 협조가 없었으면 지금 성촌의집은 없었을 겁니다. 우리가 집을 먼저 지었던 거 다 헐고 다시 시설을 개축했는데, 주민민원이 하나도 없었어요. 건물도 전통가옥은 장애인에게는 불편하기 때문에 마루를 뜯어내고 통로를 만들어 휠체어가 다닐 수 있게 만들었어요. 원생들이 어떻게 하면 불편 없이 잘 지내게 할 수 있을까에 초점을 뒀지요. 이젠 모든 건물에 편의시설을 다 갖췄지요. 생활하는 방마다 화장실과 샤워 공간, 개인 옷장, 에어컨까지 설치를 해 거주 장애인들이 생활하는데 편리하게 되어있습니다.“

장애인이 자활할 수 있는 직업교육

그는 1972년 전국에서 처음으로 장애인 전문직업재활시설을 설립하여 운영하기도 했다. 그 당시 장애인에 대한 기업의 인식은 좋지 않았지만, 기업을 대상으로 장애인들은 몸만 불편할 뿐 집중력은 오히려 뛰어난 점을 강조하며 설득했다. 이렇게 기업을 상대로 설득한 결과 단순 조립작업으로 시작하여 시계 수리와 전기코일을 감는 기술 교육 등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 당시 대대적인 경제개발 정책 시행으로 전기코일을 감는 일은 수요가 넘쳤고, 이에 일손이 딸릴 정도로 일감이 밀려들기도 했다. 이에 힘입어 장애인 기술과정이 손 기술과 감각을 요하는 병풍에 수놓는 기술과 양장기술 분야, 전자장비 생산 등으로 확대되었고, 장애인들의 꼼꼼한 일솜씨가 소문이 나면서 기업들이 찾아오기 시작하여 장애인들의 수입 또한 크게 늘었다. 이러한 직업교육과 직업 생활은 장애인들의 자립기반의 모태가 되어, 직업생활을 하며 스스로 번 돈으로 75쌍이 결혼을 하여 사회인으로 출발했고, 자립하는 케이스도 200여명이나 되었다. 이들의 당당한 사회인으로의 첫 발에 부모의 역할로, 결혼 주례자로, 사업 주관자로 함께 했던 감동들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배려해라”

그에겐 좌우명이 있다.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절대로 부정적으로 생각 하지 말자’이다. “원생들이 제 마음과 달리 가슴을 아프게 할 적도 많죠. 그러면 바로 그 자리에서 반박을 하지 않고 그냥 들어주다가 시간이 지난 다음에 데리고 상담을 하는 겁니다. 과정을 쭉 이야기해 주면 그 때는 이해하고 '잘못했다, 미안하다'는 얘기를 합니다. 장애인들은 자기가 잘못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바로 잘못했다고 안합니다. 그래서 저는 직설적으로 표현하거나 즉각 해결하려하지 않고 잘 될 거라는 생각으로 모든 것에 대처합니다.” 이런 긍정적인 태도가 그의 이상과 꿈을 이루게 한 원천이다. 그는 늘 사회복지사업을 하고 싶어서 했고 본인의 적성에도 맞았다. 자신이 조금 희생하고 노력하면 소외당하는 사람들을 많이 도울 수 있다는 생각으로 부정적인 생각을 한 적이 없다.

 

그는 일하기를 좋아했다. 장애인복지시설협회회장을 맡으면서 장애인체육대회, 장애인 예술제를 처음으로 개최하기도 하였다. 더 이상 장애를 감춰서는 안 되고 당당하게 사회인으로 보여줘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없애려는 의도였다. 또한 협회장을 하면서 각 복지시설 파트별로 각종 세미나도 열고 연구하는 사회복지시설의 위상을 높였다. 지자체 공무원들도 참석하게 하여 실상을 알게 하고 사회복지 직원 해외연수도 시행했다. 현 종사자수당제도인 직원들 수당제도도 도입했다. 차근차근 종사자들의 대우도 현실화 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리하여 장애인 및 지역사회와 더불어 살아온 공로로 그는 인천 시민상 수상을 비롯해 대통령 표창, 국민훈장 동백장 등 많은 포상을 받았다.

비전을 갖고 마스터플랜으로 차근차근

그의 인천에 대한 사랑은 남다르다. “인천은 저의 제2의 고향입니다. 시민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제가 여기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고향이라고 하듯이 자기가 살고 머무는 곳이 고향인데 지역에 대한 관심이 적어 보입니다. 서울로 직장을 다니니까 인천은 그냥 거주하고 잠자는 데로 인식하지 지역에 대한 애착심이라는 게 없어요. 부모들로부터 애착심을 가져야 자식도 달라집니다. 사람이 오고가는 정도 있고 이웃 간에 친교도 있어야하고 이렇게 했을 적에 화합이 되는 건데 그게 너무 안타까워요. 저도 자생단체 여러 개 해봤지만 지역분파가 아주 강해요. 지역에 살면 그게 없어져야 그 지역이 평화롭고 하는데 그게 좀 안타깝습니다.”

 

그는 사회복지가 제대로 실천되어야 잘 사는 인천이 된다고 믿는다. “자생단체 한 군데가 잘된다고 해서 인천의 사회복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회복지의 발전 키포인트를 가지고 매뉴얼을 만들어 공유해야 합니다. 전문 연구기관들의 육성이 필요합니다. 현장성 있는 발전 대안을 계속 내놔야 합니다. 고민하는 게 필요하다는 겁니다.” 관련해서 향후 인천의 사회복지 발전을 위해 몇 가지를 당부한다. “사회복지는 삶의 질의 문제입니다. 삶의 질은 국민의 삶의 질인데, 삶의 질이 향상됐을 때 사회복지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좀 더 거시적인 생각, 즉 어떠한 마스터플랜을 짜서 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스터플랜을 세워서 차근차근 너무 욕심을 갖고 하지 말고 실행하면 됩니다. 비전을 갖고 일을 추진해야 합니다.”

 

그는 인천에 사회복지의 씨앗과 성장의 기반을 만들었다. 이제 이를 확대하고 발전시켜할 후대의 노력만이 남았다. 그는 이후로도 영원한 사회복지인으로 기억될 것이다.

■ 김영주 대표이사가 걸어온 길 : 1934년 경기도 양평 출생, 단국대 영문과 중퇴, 현 성촌재단 대표이사. 평화원 서무, 성린보육원 총무, 성린직업재활원 원장, 성촌의집 원장 등 역임, 한국장애인직업평가회 회장, 인천장애인복지시설협회 회장, 인천사회복지협의회 명예회장 등 역임. 한국보이스카우트 인천연맹 제11대 대장, 한국보이스카우트 인천연맹 훈육위원이사, 부평경찰서 동암파출소 명예소장 등 역임. 인천시민상, 대통령 표창, 국민훈장동백장, 인천광역시 사회복지사상, 인천광역시 사회복지대상 등 수상

■ 인터뷰: 박선홍(인하대학교 언론정보학과 초빙교수)

   기    획:이종아(인천광역시사회복지협의회 사회복지연구원)

   촬    영:심재홍(인하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서원우(인하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