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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인터뷰

인천사회복지 역사박물관 > 자료 > 원로 인터뷰

인천사회복지를 빛낸 인물 인터뷰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고 기적의 역사를 이루어낸, 위대한 사회복지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김병호 前 신명재단 대표이사


 

"한센병환자에서 사회복지 큰 어른으로"

 

한하운 선생의 교육결단이 탄생 배경 

김병호 신명재단 대표이사. 그는 인천에서 나고 자란 신명재단의 1세대다. 11살 때 한센병이 발병돼 14살 때 치료하려 동인 요양소에 들어간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신명의 역사와 함께 해왔다. ‘나병환자’라는 이유로 가족과 떨어져 자란 그에게는 남다른 아픔이 있었다. 그의 희망은 재단 역사를 제대로 기록하는 것이다. 남다른 흥망성쇠를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회복지원 하고는 달라요. 다른 곳은 사회복지 사업에 뜻이 있는 분들이 시작한 것이지만, 신명재단은 처음엔 교회 부설로 요양소를 만들면서 시작했어요. 처음 이름이 ‘동인요양소’였다가 ‘성계원’으로 이름이 변경되었습니다. 저는 한센병을 앓고 있어서 목소리도 안 나오고 중증이어서 들어오게 된 거에요. 부모들은 ‘나병 환자인 아이들과 다른 아이들을 함께 교육 못 시킨다’고 거세게 반발했어요. 하지만 당시 한하운 씨가 아이디어를 냈지요. ‘우리는 분교를 할 수 없다. 여기에 땅을 사서 별도의 보육원을 만들어서 분교해서 한센병환자를 내보내지 않고 따로 키워서 일반 사회학교에 동등한 교육을 시키겠다’는 거였지요. 그래서 보육원이 만들어 졌습니다. 다른 복지사설과는 다른 특수한 경우이었지요.”

 

걷지도 못할 정도로 한센병 시달려

요양소에 들어올 때 그는 목소리가 안 나오고 걷기조차 힘들 정도로 악성 한센병환자였다. 그의 얼굴 등 곳곳에 아직 병의 흔적이 있다. 하지만 병이 신의 도움인지 치유되면서 25살에 부평 성계원에서 결혼해 청천동에 정착했다. 이후 축산업을 40년간 해오다 88년도에 사업을 접었다. 신명재단 대표이사를 한지는 올해로 6년이다. 지금의 자리에 있기까지, 그의 삶은 우여곡절의 길이었다. “형제가 8남매였는데 홍역으로 제 위로 두 명은 죽고 동생 둘도 세상을 떠나 4형제가 남았어요. 제가 11살 때인 1945년, 우리나라가 해방되던 해에 갑자기 한센병에 걸렸고 아버지마저 해수병으로 돌아가셨어요. 아버지는 인천 중구 신포동에서 일본사람 상대로 배를 타며 어업에 종사했어요. 제 학력은 초등학교 4년이 전부예요. 지금의 저를 있게 해준 것은 종교의 영향이 커요. 처음에는 주위환경 때문에 우연히 접했는데 나중에는 종교에 귀의하게 됐어요. 또 1961년에 나와서 자활을 시작했습니다. 해방 이후에 축산업으로는 제가 제일 먼저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축산업을 한 것은 제 병과도 관련이 깊습니다. 병을 앓고 있을 때 한센병 권위자인 의사가 와서 다른 서울대의대생들에게 강의 하는 걸 듣게 됐는데 ‘영양이 결핍 되서 병이 걸린다’고 하더군요. 보리쌀만 먹으면서 지냈으니까 시력이 떨어지고 신경통을 앓았어요. 그러다가 미국원조가 들어와서 밀가루랑 우유가루가 보급돼 먹으니까 제 건강도 좋아지는 걸 느낀 거죠. 그래서 닭을 한두 마리 키우다가 나중엔 3만 마리까지 키우고, 돼지, 오리, 토끼도 길렀지요. 농사를 하다보면 퇴비가 필요하니까 축산을 하고 또 사료가 필요하니 사료공장을 세웠지요. 하지만 대기업에서 사료와 축산업에 뛰어들어 경쟁이 안 돼 접었지요. 토지를 공장에 임대하니까 힘들이지 않고 수익을 보게 됐어요. 그 수익으로 세계 선교활동도 하고, 신명재단 대표이사도 할 수 있는 겁니다.”

 

더 해주고 싶은 생각과 신앙으로 운영

그는 신명재단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친인척 등 가족경영이 아니라 투명한 운영이라고 강조한다. “신명재단의 산파역은 한하운 씨입니다. 그분이 나중에는 사업에 눈을 떴고 성계원 자치회에서 일부, 학부모들의 모금으로 땅을 구입하여 보육원을 설립했고, 후에 십정농장, 청천농장, 부평농장을 대표들이 모여 신명재단을 키운 것이지요. 현재는 2세대들 운영하고 있습니다. 설립자 가족들이 참여를 안 한다는 거죠.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해 신앙이 필요하다고 해서 교회도 짓게 되었어요. 이사가 9명인데 모두 다 자영업을 해요. 그렇지 않으면 이사회에 참여도 못해요. 반평생을 여기에 관심을 쏟았습니다. 제가 불행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깊은 애정이 있고 ‘어떻게 하면 내가 못한 것을 해줄 수 있을까’하는 생각과 신앙의 힘으로 참여하는 것이지 제 자랑을 위해서는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명재단이 성장할 수 있었던 것에는 ‘자체장학금’과 비영리목적의 운영시스템 때문이다. “벌써 20년이 넘었는데 장학금을 줘서 원생들이 대학을 갈 수 있도록 기회를 줬습니다. 특히 요양원에는 이윤을 추구하려고 설립된 시설이 많아요. 하지만 우리는 오히려 재단에서 지원을 해주지요. 6년 동안 대표이사를 지내면서 시설에 필요한 대부분은 어느 정도는 구비가 됐다고 자부합니다. 신명보육원이 한국 최초로 아동복지분야 ISO 9001인증을 받았습니다.”

 

정서 안정위해 오케스트라 추진

전쟁고아가 많았던 50, 60년대와 달리 현재 복지시설 있는 아이들은 90% 이상이 가정이 있지만 부모학대 등 이유로 가정이 해체돼 들어온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마음의 상처를 받은 아이들의 정서안정을 위한 음악치유와 오케스트라 연주회이다. “이곳 아이들은 부모에게 소외받고 학대를 당했기 때문에 스스로 감정조절을 못하거나 자기표현을 못하고 또래관계를 원활하게 맺지 못해요. 늘 정서적인 문제들을 안고 있어요. 잦은 싸움 등 갈등 상황이 쉽게 일어나고, 선생들과 갈등이 생기면 분노조절 장애로 힘들어 하는 아이들이 많아요. 심지어는 ‘야, 너희들이 우리 때문에 먹고 사는 거 아니냐?’고 한다는 겁니다. 참 참담하지요. 그래서 떠오른 생각이 음악입니다. 여러 가지 어려웠지만 차근차근 준비해서 올해 제3회 오케스트라연주회를 열었습니다. 악기를 하나씩 구입했고 자원봉사자들도 주 2회 와서 교습을 합니다. 여기 있는 아이들은 숙소나 먹는 것, 입는 것 등 환경이 웬만한 중산층 가정보다 좋습니다. 해외를 가는 기회도 종종 있습니다. 제가 아프리카에서 본 그쪽 아이들의 빈곤함을 이야기하면 처음엔 아이들이 듣지도 않고 이해를 못 하더군요. 그래서 쉬운 것부터 시작을 한 게 오케스트라 구성입니다. 이젠 많이 달라졌어요. 오케스트라 연주가서 구경도 하고, 연주도 하고, 연습도 이렇게 하니까 아이들이 변하더군요.”

 

그는 직원 채플에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리 신명보육원은 꿈이 있는 꿈나무들이 자라는 곳으로 요양원은 흔히 제2의 고려장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돌봐 주기를 부탁합니다. 오고 싶어 하는 복지 재단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직무를 했느냐’ 보다는 ‘어떻게 했느냐’가 더 중요하다”라고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원생들에게 당부한다. ‘참되게 살아라’고. “거짓되게 사는 사람들의 끝은 반드시 자기가 살아온 데로 결과가 맺어지고 심판을 받는다는 복음을 기억하고 진실 되게 살기를 바랍니다.” 그는 신명재단이 사회복지 사업으로서의 본연의 임무와 본연의 사명을 지속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그가 성장한 삶의 터전이기 때문이다.

 

■ 김병호 신명재단 대표이사가 걸어온 길: 1935년 인천 송림동에서 출생, 한민족사랑 네트워크 대표이사, 해피나우 NGO 대표이사 역임, 장로신문 사장 역임, 신명재단 이사 및 대표이사 역임, 한국어린이 전도협회 인천지회 대표이사 역임, 국제기드온협회 북인천캠프 회장 역임

 

■ 인터뷰: 박선홍(인하대학교 언론정보학과 초빙교수)

   기    획:이종아(인천광역시사회복지협의회 사회복지연구원)

   촬    영:심재홍(인하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서원우(인하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