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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인터뷰

인천사회복지 역사박물관 > 자료 > 원로 인터뷰

인천사회복지를 빛낸 인물 인터뷰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고 기적의 역사를 이루어낸, 위대한 사회복지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김광용 명성복지회 대표이사


선대에 이은 끝없는 사회복지

 

인천 유일 전쟁 혼혈아 보호시설

 

그에게 사회복지는 천직이다. 복지관의 역사가 가족의 역사를 대신한다. 선대에 이어 명성복지회 계양종합복지관을 운영 중인 김광용 대표이사다. 복지관의 역사는 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올해 돌아가신 아버지 김진원(1924~2014) 옹과 어머니 이순옥(세례명: 말가리다․1930~1997) 전 대표이사에 이어 장남인 그가 1992년 4대 대표이사를맡는다. 부친은 1963년까지 20년여 동안 인천에서 공직생활을 했다. 이후 부친은 ‘삼영제과’를 운영하였고 모친도 목욕탕 사업을 시작한다. 당시 인천에서 가장 큰 신흥동 ‘처녀목욕탕’이 그것이다. 이것이 추후 복지관을 인수하는 종자돈이 됐다. 아버지는 1964년 혼혈아 육아시설인 ‘명성원’을 만든다. 1958년부터 다른 분이 운영하던 곳을 1964년 12월 5일에 정식으로 설립허가를 받아 운영을 시작한 것이다.

 

계양종합복지관의 전신인 명원원은 전쟁고아 중에서도 혼혈아를 육아하는 시설이었다. 설립될 당시부터 혼혈아가 많이 들어왔다. 1970년대에는 해외입양이 많았다. 원생들은 나이가 많은 아이들은 1948년생부터, 1962~63년생으로 까지 다양했다. 초등학교를 들어간 원생들도 제법 많았다. 대부분 한국전쟁 이후에 태어난 아이들이었다. 곱슬머리에 까만 피부의 외국인 같은 모습을 띤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은 당시 부평에 있는 728헌병대를 자주 갔는데 그곳에 미군헌병대가 있었고 청천동에는 미군구치소가 있었다. 그곳에서 나오는 우유와 정부에서 준 원조 쌀로 아이들을 먹였다. 부모는 아이들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기술교육에 힘을 썼다. 그땐 의무교육이 중학교까지여서 형편상 고등학교를 진학할 수 없어 시설에 있는 고아들을 자동차 정비부터, 중장비 정비, 선반 등을 교육시켰다. 모친 이 씨는 원생을 대상으로 고전무용을 가르치며 한국전통무용단(Korean Folk Dancing Group)을 만들었다. Korean Folk Dancing Group은 한국에 있는 미군부대를 돌며 공연을 했고 이러한 인연으로 미군들은 시설고아들을 입양했다. 김 관장도 1968년부터 부모를 도우며 이곳에 몸을 담았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일단 직업교육을 하려면 여러 시설이 필요했다. 국가 지원을 받아 선반이나 용접교육을 위한 시설을 세웠다. 기술을 익혀 사회로 내보내 당당하게 살길을 찾도록 하기위한 방안이었다. 직업훈련을 통해 배출한 아이들만 500명이 넘는다. 매년 많을 땐 60명도 수료하고, 여자원생들은 자수까지 가르쳐 삶의 방편을 마련해줬다.

 

자립할 수 있는 직업복지시설로

하지만 이 직업훈련은 1980년대에 들어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당시 사회분위기가 중학교를 졸업한 후 고등학교와 대학으로 진학하는 것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불가피하게 직업훈련시설을 없애고 고등학교로 전환했고 보유하던 기계 선반부터 금속 가공시설까지 그대로 유지해 활용했다. 학교는 재학생이 1000명이 넘을 만큼 성장했다. 하지만 이 또한 오래 가지 않았다. 1997년 폐교했다. 사회 분위기가 실업계 보다는 인문계를 선호하는 것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인문계 고등학교를 운영하다 중단했다.

 

영아원도 있었다. 1980년대 초이다. 당시 인천도 산업화가 진행되자 전쟁고아가 아닌 미혼모가 많이 생겼다. 미혼모가 아이들을 키울 수 없게 되자 버려진 아이들이 많이 생겼다. 인천에 혜성영아원이 있었지만 수용시설이 부족했다. 그래서 어린 아이들을 받기 시작했다. 명성원에서 유아원도 세우고 상담소도 만들었는데 원생의 20%만 국내에 입양되었고 나머지80%는 해외입양을 가게 되었다. 때문에 유아시설이 아이들을 ‘수출’한다는 오해를 받았다. 이에 대해 그는 “당시 혼혈아를 기르는 곳이 여기밖에 없으니까 이곳으로 모두 왔어요. 입양은 입양기관에서 하는 것이고, 우리 시설은 보호시설입니다. 보호하는 시설을 폄훼하는 분위기가 있었지요”라며 안타까워했다.

 

아이들 가르치려 직접 정비 배워

그는 1997년 인천 계양구 서운동으로 복지관을 옮겨 본격적으로 복지와 사회교육 사업을 시작했다. 명실공히 종합복지관이 됐다. 사회적인 요구에 맞춰 노인복지센터도 새로 만들었다. 현재 노인센터, 요양원, 푸른솔아동센터 등을 운영한다. 이런 종합복지관이 만들어지는데 반세기의 시간이 걸린 셈이다.

 

반세기의 복지관 역사는 그의 역사다. 김 대표이사는 인천고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부모가 하는 복지사업을 도왔다. 그만큼 복지관은 그에게 삶의 터전이었다. 1972년 대학을 졸업하고 다른 직장을 잡았지만 1년 만에 다시 복지관으로 돌아왔다. 3대 대표이사인 어머니 혼자 복지원을 꾸려나가기엔 역부족이었다. 어머니를 도우려 복지사업에 뛰어든 그는 1984년 명성직업훈련원 원장을 맡는다. 각 복지관 대표회의를 나가기도 했다. 김 대표이사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1997년까지 사실상 경영실장 역할을 맡았다.

 

그는 90년에 명성복지회 대표이사를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시설장과 직업훈련원장을 맡았다. 이곳에서 아이들을 독립시킨 장본인이다. 직접 자동차 정비를 배워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는 “내가 경영학과를 갈 게 아니라, 다른 과를 갔어야 했었어요” 라고 술회하기도 했다. 그는 경영대학원을 진학한 이유가 사회복지 자체가 어려운 실정이고 국가의 열악한 지원 때문에 사업이라도 하며 복지사업에 도움을 줘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008년엔 사회복지학을 공부해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뒤늦은 공부지만 필요해서 하는 것이라 큰 도움이 되었다” 고 말한다. 실제로 인사관리와 조직관리 하는 데 경영학 석사학위 취득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기억한다. 복지를 학문적으로 공부하는 계기도 되었다.

 

살기 좋은 동네 조성이 최고복지

그의 아들도 그를 도와 복지법인에서 일한다. 아프리카에서 사업을 하던 첫째를 한국으로 불러들였다. 복지관 관장의 정년이 65세기 때문에 그 전에 자식에게 복지관 일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아프리카에서 조달사업을 하던 첫째를 불러 학부 편입부터 시켜 사회복지사 1급을 따게 하였다. 그의 둘째 아들도 곧 이곳을 도울 예정이다. 3대의 일생이 고스란히 녹아들어간 복지관인 셈이다.

 

그는 인천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다. “인천에서 태어나서 66년을 인천에서 살았으니까. 인천은 자랑스러운 내 고향입니다. 쓴 소리를 하나 하자면, 지난 인천아시안게임은 2조원 넘는 빚을 남겼습니다. 그 돈은 인천복지 쪽으로 갔어야 했습니다. 건설 쪽에 모든 것을 거는 것 같아 안타까웠습니다.”

 

김 관장은 인천의 복지방향을 제시한다. “제가 ‘인천아이 낳기 좋은 세상 본부’의 운영위원입니다. 보육에 관심이 많습니다. 아이를 낳을 때 더 많은 혜택을 줘야합니다. 지원은 없고 출산만을 강요해선 안 됩니다. 아이들이 많아지는 것이 복지의 척도입니다. 아이들에 대한 복지예산이 많이 필요합니다. 인천을 아기자기하게 좋은 동네로, 살기 좋은 동네로 만드는 것이 최고의 복지입니다.”

 

대통령까지도 클라이언트할 자세로

그의 복지철학도 확고하다. “사람이 사는 데는 끝이 없다. 복지도 그렇습니다. 내가 행복하고, 내가 좋아하고, 내가 만족하는 것이 사회복지입니다. 뭐든지 욕심을 내면 끝이 없어요. 저는 늘 기대치나 희망을 적게 잡고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생활하려합니다. 내게 주어진 임무에 충실 하라는 것이지요. 이것이 제 좌우명이기도 합니다.”

 

끝으로 그는 후대 사회복지사들에게 당부했다. “사회복지사 여러분들이 복지를 공부하면 어렵고, 희망적이지 않다고 생각할 겁니다. 국가가 제대로 지원을 못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사회복지사들이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의 길을 개척을 해서 권리를 찾고, 큰 뜻을 실현하기를 바랍니다. 대통령까지도 클라이언트(사회복지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대상자, 혹은 사회복지서비스를 받는 대상자)로 둬 내가 그의 멘토가 될 수 있는 그런 훌륭한 사회복지사가 되기를 바랍니다.”

 

김광용 대표이사가 걸어온 길: 1949년 인천 출생, 인천고 졸업, 국민대 목축학과-인하대 경영대학원 경영학과-인하대 정책대학원 사회복지학과 졸업, 명성직업훈련원 원장, 명성복지회 대표이사, 인천북공업고등학교 교장, 계양종합사회복지관 관장, 인천 사회복지협의회 부회장, 인천 아이낳기세상본부 운영위원, 인천 계양구 자원봉사센터 운영위원장, 인천복지관협회 회장, 보건복지부 장관 표창.

 

■ 인터뷰: 박선홍(인하대학교 언론정보학과 초빙교수)

   기    획:이종아(인천광역시사회복지협의회 사회복지연구원)

   촬    영:심재홍(인하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서원우(인하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